췌장암 4기 6년 생존 포기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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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장암 4기 6년 생존 포기하지 않기

2017년 6월 나의 어머니께서는 환갑의 나이에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으셨다. 포스팅 기준 2023년 4월, 만으로 5년 하고도 10개월째 일상생활이 가능한 상태로 생존 중이시다. 조금 있으면 만으로 6년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아 남겨보는 두서없는 내 어머니의 췌장암 4기 기록.


2017년 6월. 개인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던 시기에 두 살이 많은 누나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엄마 어떡하냐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힘들게 꺼낸 한마디는 '엄마가 췌장암이래......'였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누나에게 무슨말을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었다. 하지만 남자인 내가 누나를 위해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걱정하지 말고 잠시 기다리라고. 당장 달려가겠다고. 당장 인터넷으로 췌장암을 검색해 보았을 때 안 좋은 이야기만 가득했다. 암 중에서 가장 통증이 심하고 예후가 좋지 않고 생존 가능성이 낮다면서 내 머리와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회사에 오후 반차를 사용하고는 아내와 함께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있는 아이들을 태우고 엄마가 있는 김해의 어느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내가 생각했던 엄마의 약은 손자들이었다. 이쁘고 귀여웠던 손자들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힘을 얻기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병원에 도착해 병원 복도의자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랐지만 정신을 되잡으며 아이들에게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안아 드리라고 했다. 손자들을 품에 안으며 웃음을 보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췌장암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만 알고 있으면서도 어머니에게는 괜찮다고. 요즘 의술이 좋아져서 치료가 될 거라는 희망의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회사도 바쁜에 뭐 하러 여기까지 왔냐고 하시면서 자기는 괜찮다고. 우리 손자 아픈 병 내가 죽을 때 가지고 가야 하는데 하시면서 어머니 본인의 병 보다도 둘째 손자를 더 걱정했다. 그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나의 둘째 아들은 출혈 시 피가 멈추지 않는 혈우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송골송골 맺힌다.

 

엄마, 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병원 의사선생님을 만나러 들어갔다. 현재 어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으며 전이가 되었을 확률이 높고 4기(말기) 일 것이라고 한다. 췌장암은 지금처럼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 서울의 큰 대학병원의 도움을 받기 위해 소견서도 받아 두었다.

췌장암 증상

김치공장에 다니시던 어머니께서 일을 그만두시고 누나의 아이들을 케어해주게 되면서 건강검진은 우리 돈으로 1년에 한 번씩 받게 해 드렸다. 건강검진 결과에는 큰 문제점을 찾지 못했는데 검진이 끝나고 한 달 조금 지났을 때 어머니께서 배가 더부룩할 때가 있고 자주는 아니지만 약한 통증을 느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별일 아니겠거니 넘기시다가 김해 종합병원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자신의 병을 진단해 준 의사 선생님께 음료수 박스를 사서는 고맙다면서 전해주시더라. 그때 김영란법인가 뭔가 해서 의사 선생님께서는 마음만 받고 음료수를 받지 않았지만 나의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무거운 마음을 간직한채 병원 근처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를 했다. 몸에 좋은 메밀국수를 판매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머니의 마음 상태는 어떠한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는 갈 사람은 가야지 하면서 덤덤하게 이야기하셨고 누나와 나는 그런 일 없다면서 엄마를 꾸짖었다.

 

당장 생각나는 서울의 큰 병원이 서울아산병원 이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큰 병원답게 예약이 쉽지 않았는데 천운이라고 해야 할지 전화 통화 중 예약을 취소하는 사람이 생겨 그 시간에 바로 예약이 가능했다. 상황을 설명하며 전화만 2~30분 정도 들고 있었던 것 같다. 바로 3일 뒤에 서울 아산병원 예약이 잡힌 것.

 

서울 아산병원에서 엄마, 누나와 조우했다. 회사도 바쁜데 오지 말라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월차를 쓰고는 몰래 병원에서 만난 것이다. 큰 병원답게 손님도 환자들도 많았으며 진료를 보기위해서 많은 대기를 해야 했다. 교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 아래에 있는 의사 선생님과 현재 어머니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김해 병원에서 촬영한 mri자료도 첨부했다.

 

막연하게 아산병원에서는 더 상태가 좋게 진단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보다 자세한 상태 확인을 위해 입원해서 PET CT 등 검사가 필요했는데 큰 병원이다보니 입원 예약도 엄청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운이 좋았는지 일주일 뒤 1인실 특실에 자리가 있다면서 그곳으로 예약을 했다. 하루 병실료만 60만 원이 넘는 곳이었지만 그때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시기 전 일주일동안 췌장암에 대해서 참 많이도 알아보고 검색해 봤던 것 같다. 각종 밴드, 카페 등에 가입해 췌장암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을 들일 때마다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상황에 많이 노출되게 되었다. 긍정적으로 파이팅 하면서 환우를 돌보던 가족들이 고인의 비보를 전하며 올리는 글들에 적지 않게 공감이 일었다.

 

일주일 뒤 병원에 입원했을때 서울에 사시는 친척분들께서 방문해 어머니를 응원했다. 먼 친척이지만 이런 분들이 있어 너무 감사했다. 짧은 기간 동안의 입원이었지만 이곳에서의 췌장암 진단도 결국 4기(말기)였다. 췌장암 주변 장기들에 전이가 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수술은 불가능했고 항암치료 말고는 답이 없다고 했다.

 

현재 4기인 것 을 고려해 아브락산과 젬자라는 치료제로 항암을 실시했다. 첫 항암체 투약 때문이었을까. 어머니께서는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고 말수가 적어지셨다. 항암치료는 서울에서 하나 지방 큰 병원에서 하나 약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양산부산대학교병원을 전원하며 항암치료를 하기로 한다.

 

어머니의 가족 사진

어머니께서는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가족들 다 모아두고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싶다고 한다. 토요일 주말 엄마, 이모, 누나가족, 나의 가족 온 가족들이 모여서 김해의 어느 박물관 정원에 도착했다. 카메라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던 터라 내가 사진사가 되어 가족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아직은 이전 모습 그대로의 어머니. 머리는 풍성하고 붉은색이 조금 들어간 염색도 세련되게 보였다. 가족사진을 마치고 어머니께서 나를 따로 부르더니 독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셨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던 나는 초록빛깔 식물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어머니의 독사진을 남겨 드렸다. 슬픔에 잠긴 모습은 없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내 카메라의 모델이 되어주셨고 옅은 입가의 미소와 눈웃음으로 생긴 눈가의 주름에 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엄마를 위한 가족사진

이날 촬영한 가족사진은 바로 크게 인화해서 어머니 집에 액자로 걸어두었다. 

 

췌장암 항암

어머니는 1주에 1회 항암을 3주간 진행했고 1주는 쉬는 일정이었다. 아산병원에서 했던 것처럼 아브락산과 젬자 두 가지 항암제를 투여받았는데 항암 할 때마다 컨디션이 다르긴 했지만 대부분 미간이 찌푸려지고 고통스럽고 힘없어하는 모습이 눈에 띄게 보였다. 항암이 끝나고 병원에서 가까운 누나 집에서 요양을 했으며 큰 고통에 시달리기 일쑤였고 입맛이 사라져 식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어떻게든 밥을 먹기 위해서 노력했고 음식은 당기는 음식이라면 무엇이든지 먹이려 했다.

 

췌장암에 좋은 음식을 찾다 보면 자동으로 다양한 기호식품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중에서도 차가버섯을 구입 직전까지 갔던 적이 있다. 하지만 어머니 담당 선생님께서는 액기스나 물로 먹는 것보다 직접 입으로 씹어서 넘기는 음식을 먹길 권고했다. 특히 등 푸른 생선인 고등어나 갈치류를 추천하더라. 이런 이유로 돈을 떠나 진액류의 제품은 구입하지 않았으며 특히 자주 먹었던 음식은 부추와 고등어, 갈치 등이다. 어떤 분들의 후기를 따라서 부추와 요구르트를 믹서로 갈아서 오랫동안 먹기도 했다. 부추가 좋다는 말에 주위 분들께서 직접 밭에서 재배한 유기농 부추를 선물해 주는 경우도 많았으며 어머니와 직접 수산 시장을 방문해 고등어 갈치도 자주 구입했다.

 

종교

어머니는 기독교다. 나는 무교다. 어머니의 평생소원은 아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 나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서 매주 교회에 나갔다. 처음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갔을 때 기도하는 시간. 덤덤하고 괜찮다고만 하던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힘주어 쥐고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함께 오열하며 기도를 했다. 그런 엄마의 절실함과 마음 상태를 그때 더 잘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이 교회에 향해있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위해 오랫동안 교회에 참석했고 식사 당번 등 엄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둘째

만약 어머니께서 종교가 없었다면 믿고 기댈 곳을 찾지 못해 더 힘들었을 수 있었다.

 

탈모

항암으로 강한 약을 두 가지나 사용해서였을까 우려했던 대로 어머니의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당사자가 가장 심리적으로 힘들었겠지만 옆에서 별말 없이 지켜보는 가족들도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다. 어머니께서 부끄럽지 않으라고 나도 삭발까지 하려 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자동적으로 모자를 구입하는 일이 많아졌고 병원에 방문할 때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이신 환자들이 어머니가 사용하는 모자를 많이 쓰고 있다는 것 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맞춤 가발도 사드리려고 많이 알아보았었는데 비싼 가격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후회된다. 적당한 가격대의 가별도 몇 개월 사용하긴 했지만 불편해서 오래 사용하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머리가 빠져도 이쁘다고 너스레를 떨긴 했지만 이전과 다른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의지

나중에 어머니께서 이야기해 주신 것이지만 처음 췌장암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삶의 끈을 놓으려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 아산병원에 잠시 입원해 있던 시절 병문안으로 찾아온 삼촌께서 안부와 함께 돌아가셨을 때 장례는 어떻게 치러야 할지 등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다들 가족들 간의 가정사가 있겠지만 평소에도 많은 것들에 감성이나 감정보다는 현실적으로만 살아가시는 삼촌이었는데 그때 나누었던 말들이 괘씸하게도 느껴지셨다고. 어쨌든 덕분에 다시 살아야 할 의지를 다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호전

내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확실히 언제쯤 증상이 호전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수개월 동안 항암치료와 CT검사로 상태를 확인했을 때 긍정적인 소견이 나왔다. 피검사 수치가 좋아졌고 췌장 주위로 전이되었던 암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던 것. 카톡으로 내용을 공유하면서 누나와 나는 기뻐했다. 검사가 진행될수록 전이되었던 암의 크기는 지속적으로 흔적을 줄여갔다.

 

이 것은 좋은 신호였다. 보통의 췌장암 4기 말기 환자에게는 보기 드문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항암제가 어머니와 잘 맞았던 것 같기도 하다. 증상이 좋아지면서 이제는 유지 요법으로 들어갔다. 두 가지 항암 중에서 한 가지를 제외하고 하나만 맞기 시작한 것. 그 이후부터 몇 개월이 지났을까. 어머니의 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검은 머리가 아니고 숯도 많지 않았지만 꾸준히 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사실

췌장암의 증상이 개선되고 있다고 해서 어머니의 몸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췌장암을 앓기 시작하면서 이전에 아프던 곳들이 함께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항암제 때문이리라. 손목도, 다리도, 허리도 통증을 호소할 때가 많았으며 항암 후 컨디션 난조는 계속되었다. 오전 9시 30분 ~ 10시 30분에 교수님 진료가 끝나고 항암을 시작하면 보통 낮 12시~1시 정도에 항암이 끝나는데 양산 부산대학교 병원 근처에서 식사를 했다. 컨디션이 좋으면 즐기면서 식사를 하기도 했지만 살기 위해서 억지로 식사를 끝마치기도 했다. 누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무 말 없이 등을 의자에 기대어 힘없이 누워있기도 하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아들인 나에게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누나집에 도착하고 쉬면서 큰 고통을 감내했던 적도 있다고 누나가 알려주었다.

 

어머니의 컨디션을 고려해 가면서 여행도 종종 다녔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 하지만 항암을 하면서 어머니의 컨디션의 기폭이 높아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몸보신을 위해 맛있는 오리백숙 식당을 많이 방문했던 것 같다.

 

누나는 깐깐하게 어머니의 몸관리를 도맡았다. 항상 몸에 좋은 유기농 같은 것 들. 맵고 짜고 인스턴트는 절대 안 되고 등등 하지만 병원 의사 선생님의 뜻을 이어 나는 어머니가 입맛 없을 때는 자극적인 음식들도 먹였던 것 같다. 특히 어머니가 이전부터 좋아하시던 코다리조림 식당은 몇 번이고 이용했을 정도다. 그나마 자극적이긴 해도 100% 국내산만을 고집하던 식당이라 부담은 덜했다. 이런 식당들을 미리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현재

CT로 확인하기에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암세포가 보이지 않으며 현재는 유지 요법으로 항암을 이어오고 있다. 컨디션의 기폭은 여전히 존재하며 입맛도 그때그때 다르다. 손자들이 좋아하는 할머니 국수를 가끔씩 만들어 주시기도 하시고 시장에 방문해 이것저것 구입하기도 하고 사람들과 계모임을 이어가고도 있다. 일주일 중 힘들 때가 며칠씩 있지만 기본적인 일상생활은 영위하고 계신다. 현재 누나의 집은 김해가 아닌 부산으로 거제도와 부산을 혼자서 오고 가면서 지속적인 항암치료 중에 있다. 병원에 방문할 때는 여전히 무조건 누나 혹은 내가 함께 한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혹시 모를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거라는 우리들의 생각 때문이다. 가끔은 밀양에 있는 이모께서 엄마와 함께 병원에 방문해 주시기도 하다.

 

솔직히 나보다는 누나의 고생이 훨씬 크다. 나보다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어머니의 많은 부분들을 더 공감하고 느끼기 때문이다. 서로 부딪히는 일도 많다. 음식을 안 먹으려는 엄마나 집안 정리 등의 소소한 부분들로 인한 혹은 육아와 관련한 다툼도 여전하다. 둘 다 많이 고생 중이다.

 

우리 가족은 장난으로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손자들 결혼해서 아기들 낳을 때까지 살아 있을 거라고. 우리 엄마 TV에 나가서 췌장암 완치 인터뷰라도 해야겠다고. 사람들에게 췌장암 4기도 5년 넘게 생존할 수 있다고 말이다. 

 

병원 침상이 아닌 어머니의 집에서 지금처럼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삶의 희망을 놓지 않고 가족 모두 한 마음으로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췌장암 말기를 검색하면 무서운 글들이 너무 많다. 픽션도 아닌 실제 췌장암 가족들의 호소력 높은 글들이기에 마냥 괜찮다는 말로 이겨내기도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처해진 증상이나 환경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내 어머니처럼 4기 판정을 받았지만 만으로 6년 동안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생존해 있는 케이스가 있으니 당신도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나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되기를.

 

대한민국 췌장암 명의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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